Monday, January 25, 2010

3D-Vision 체험기

언젠가 영화관에서 3D 영화를 볼 기회가 있었다. 아마도 편광 안경을 쓰고 본 것 같다. 그 때, 영화 내용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화면 효과 만큼은 정말 대단했던 기억이 있다. 이것이 내 최초의 만족스러운 가상 3D 체험이었다.

그 이전에도 가상 3D 체험은 몇 번 있었다. 중학교때 교과서에 실려 있던 태풍의 눈 사진. 한쪽은 파랑, 한쪽은 빨강 셀로판지를 댄 입체안경을 쓰고 보면 입체로 보인다던..... 그런데 그건 별로 입체적이지 못했다. 게다가 아름답지도 않았다. - 교과서 라는 책, 그것도 과학 교과서에 실린 게 아름다와 보이긴 쉽지 않을 것도 같다. 또, 비슷한 입체 안경을 쓰고 보게 되어 있던 영화. 나이트메어 시리즈 중 하나를 그렇게 봤는데, 너무 엉성한 느낌이었다. 약간의 3D 효과를 위해 영화 전체의 색상을 희생하는 것은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게다가 그때도 내용은 전혀 맘에 안들었던듯. 마지막으로 한동안 유행하던 소위 '매직 아이' 라 불리는 스테레오그램. 이것은 아름답고 신비롭긴 했지만, 제한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데다가 섬세한 표현은 쉽지 않다.

뭐, 이런 저런 경험들을 바탕으로 별다른 기대 없이 본 영화는 정말 환상적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영화 내용은 전혀 내 취향이 아니었고, 오직 가상 3D 효과가! 특히나 용을 타고 날아다니는 장면에서는 그때 즐기고 있던 (지금도 즐기고 있는) WOW 라는 게임과 오버랩 되면서, WOW를 이렇게 실감나는 입체화면으로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었다.

한동안 잊고 지냈었는데, graphic chip 의 명가(?) nVidia 에서 떡밥을 던졌다. 3D-Vision 이라는 제품을 내놓은 것이다. Active shutter 방식의 안경을 사용한단다. 그래서 120Hz 의 주사율을 지원하는 display 가 필요하다. 원래가 graphic chip 제조 회사인 만큼 당연히 최신의(처음 발표 당시의 최신) nVidia graphic chip 을 장착한 비싼(!) video card 역시 필요하다.

이미 환상적인 가상 3D 의 맛을 본 나로서는 지름신이 강림하실 만한 일이었으나,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Video card 대충 20만, 안경 20만, 가장 무서운 120Hz 지원 모니터는 대략 60만. 게다가 active shutter 방식이란 것이 과연 극장에서 사용되는 편광안경 이상의 효과가 있을 것인가, 아무리 커 봐야 극장 화면과 비교하면 코딱지 만한 모니터에서도 3D를 느낄 수 있을 것인가 등등을 망설이지 않고 선뜻 시도해 볼 만한 금액은 절대로 아니다. Video card는 좋은 거 사면 다른 데에도 많은 도움을 주지만 안경과 모니터는 3D-Vision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아무 짝에도 쓸 데 없는 쓰레기가 되어 버리는 것이니까.

가끔씩 생각날 때마다 인터넷에서 3D-Vision 관련 물품 가격이 떨어졌는지, 대중화가 되고는 있는지 살펴보긴 했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아직까지는 극소수 매니아 층만 시험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날, nVidia 에서 3D-Vision 체험관을 열었다는 신문 기사를 접했다.

기사를 좀 읽어보니, 기존의 피씨방에 몇 자리를 3D-Vision 체험관으로 만들었단다. 그럼에도 체험관은 서울에만 달랑 두군데. 한군데는 홍대앞, 또 한 군데는 신림동.

먼저 기사를 본 다음날 홍대앞으로 달려갔다. 들어가자 마자 눈에 잘 띄는 몇 자리에 3D-Vision 체험 어쩌구 하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직원한테 체험해 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한자리 있긴 한데요, 아직 설치도 제대로 안 됐고, 제가 오전만 하는 알바라서 잘 몰라요."

5분 이내의 사용이면 요금이 청구되지 않으니까, 설치가 제대로 되어 있는지 확인해 보란다. 컴이 부팅되는 동안 주변을 보니 3D-Vision 체험 좌석에 스타 하는 사람, 워드 작업 하는 사람 등이 있을 뿐이고 환상적인 가상 3D를 체험중인 걸로 보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서 불안했다.

컴의 제어판에서는 3D 에 관련된 아무런 것도 찾을 수 없었다. 안경을 USB에 연결하고 버튼을 눌러 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다. nVidia와, 피씨방과, 애꿎은 알바까지 마음속으로 욕하면서 돌아와야 했다.

그 다음은 신림동. 여기도 개판이면 반드시 nVidia에 항의전화를 하고 말리라, 무책임하게 홍보기사를 올린 각종 신문사에도 항의전화를 하리라 다짐하며, 별 기대 없이 해당 피씨방을 찾았다.

여기는 설치가 잘 되어 있긴 했다. 하지만 역시나 주변에 가상 3D를 체험 중인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홍대앞의 피씨방과는 달리 무척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은 직원의 설명을 따라서 시연 동영상 몇 편을 볼 수 있었다.

불행하게도, 작은 모니터에서는 만족할 만한 3D 효과를 볼 수 없었다. 내 눈이 촛점을 수시로 전환하는 데에 익숙해 지지 못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니터의 프레임과 주변의 사물들이 촛점 전환을 방해하기도 한다. 온 시야를 덮어 버리는 영화관의 대형 스크린과는 도저히 비교 불가능.

시연 동영상 따위를 보려고 3D-Vision을 구입할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어쩌면 가장 중요할 수도 있는 WOW를 바로실행해 보았다. 누군가가 설치한 이상한 add-on 덕분에 login 하는 데 힘들었지만, 기어이 모든 것을 초기화 하고 login에 성공했다. 내가 서 있는 달라란의 거리,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정말 활기차고 생생한 모습이었다! WOW는 nVidia 공식 사이트에 따르면, 3D-Vision에 대한 지원이 최고 등급이란다.

달라란 거리를 벗어나, 하늘을 좀 날아 보았다. 역시나 표현해야 할 깊이가 깊어지면 내 눈이 적응을 못하는지, 표현이 부족한지, 촛점이 잘 안 맞는 느낌이 든다. 그래도 대체적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바깥 지역에 내려서 전투를 해 보았다. '으악' 이었다. 3D 효과를 못받는 것 같은, 혹은 깊이 설정이 전혀 다른 마우스 커서와 각종 인터페이스 창 등은 촛점 변경을 효과적으로 방해한다. 눈이 멍 해 지고, 전투 상황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적응하면 괜찮아지려나?

적응과 상관 없이 나타나는 문제는 여전히 있었다. Active shutter 방식의 안경이 화면과 sync 맞추는 데 시간이 좀 걸린다. 3D 효과를 켜고 처음 1~2분 정도는 가끔씩 화면이 번쩍거리는 느낌이 든다. 또, 아무리 120Hz 표현 가능한 모니터라 해도 어쩔 수 없는 LCD. 느린 반응속도 때문에 프로게이머들은 기피한다는...... 그래서 어두운 배경에 밝은 색의 물체가 있는 경우, 잔상이 남는다.

위의 두 가지는 기술이 발달하면 나아질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Active shutter 방식의 안경. 눈으로 들어오는 빛의 양의 절반을 가려주는 녀석이다. 주위가 상당히 어둡게 보인다. 게임을 즐기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화면만 바라보면 되는 영화 관람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행동이다. 키보드, 마우스 등이 제대로 보이지 않으면 힘들다. 그런데, 어두운 피씨방에서는 키보드 확인도 쉽지 않을 정도로 시야가 어두워져 버린다. 낭패다. 또, 나처럼 이미 안경을 쓰고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고려를 해서 나왔다지만, 추가 안경이 편하지만은 않다. 이런 점들은 현재로서는 한계라고 볼 수밖에 없다.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눈이 적응할 수 있도록 한두 시간 플레이를 해 보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이후의 일정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현재 소감은 아직까지는 구매 보류. 기술적인 한계와 지원의 불완전함 때문에 아직은 즐거운 WOW 생활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평소에는 보통 화면으로 플레이 하다가, 하는 일 없이 날아다닐 때만 3D 효과를 켤 수는 없지 않은가.

피씨방에서 요구하는 설문지를 작성해 주는 것으로 짤막한 3D-Vision 체험은 끝났다. 아직은 뭔가 아쉬운 느낌이 없지 않다. 앞으로 여러 회사들의 분발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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