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pril 02, 2011

빈말

신문에서 이런 기사가 눈에 띄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4011545251&code=920100

이 링크가 얼마 동안이나 살아 있을 지 모르니 내용을 간추려 보자면, 알바생들이 선정한 사장님의 거짓말 순위. 1위, 다음에 꼭 놀러와. 그 다음부터 차례로 알바비 곧 올려줄게. 그동안 수고했어. 알바비 곧 줄게. 이번까지만 고생하자. 이달 매출이 적어. 열심히 하면 직원으로 뽑아줄게. 알바생 더 뽑아줄게, 조금만 참아. 담엔 보너스 더 줄게. 반대로 알바생들이 하는 거짓말은 1위가 오래 일할게요. 그 다음부터는 힘들어도 괜찮아요. 열심히 할게요. 몸이 좀 안좋아요. 집에 급한 일이 있어요. 차가 너무 막혀서요. 사장님이 최고예요. 제가 안 그랬는데요. -_-;

척 들어 봐도 그냥 '아... 이건 아니구나....' 싶은 말이 꽤 많은 것 같다. 법이 정한 최저임금도 채 못 받는 일이 당연시 되는 알바들과, 뭐든지 다 지들이 하려는 대기업 틈에서 피가 마르는 점주들 입장에도 나름 어려움이 있긴 하겠지만, 정말 비겁한 거짓말들이다.

그런데, 사장님의 거짓말 중 1위인 '다음에 꼭 놀러와'. 이건 좀 의외다. '진심' 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위에 열거된 다른 대사들에 비하면 '선의의 거짓말'에 가깝지 않은가! 도대체 어떤 이유로 이 대사가 1위가 된 것일까?

어린 시절에, 모 학원에 잠시 다닌 적이 있었다. 소정의 과정을 수료하고 나서, 마음 좋아 보이는 원장님이 바로 저 대사를 했다. 어린 마음에도 '내가 학원에 놀러 올 일이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길에서 그분을 다시 마주치게 됐는데, 다시 '언제 한 번 꼭 놀러 와' 라고 하시는 것 아닌가. 난 혼란스러웠다. 어른들 말씀을 잘 듣는 것이 미덕이라 생각한 어린 시절이었기에, 내가 놀러 가지 않아서 저분이 서운하셨겠구나 하는 생각까지 했던 것 같다.

며칠 뒤, 짬을 내서, 정말로 학원에 놀러 갔다. '응? 웬일이니?' 하는 좀 당황한 듯한 원장님. '아... 언제 한 번 몰러 오라고 하셔서.....' 소정의 과정을 마치면 뿔뿔이 흩어져 버리는 학원의 속성상, 아는 원생들도 단 한 명도 없고, 불행히 그 전에 나를 가르치던 선생님도 안 계신 것 같았다. 단 한 명 아는 사람, 그리고 나를 '초대' 한 것으로 되어있는 그분은 내 등장에 적잖이 당황한 모습이었고, 나는 그제서야 내가 들었던 말들이 아무런 내용도 알맹이도 없는 '빈말' 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앉아서 차를 한 잔 마셨는지, 학원 차를 타고 왔는지, 아니면 걸어 왔는지, 무슨 얘기를 했는지, 아무런 기억도 남아 있지 않은데, 눈이 휘둥그래진 채 당황하던 원장님 모습만 생생하다.


한 번 더 그 비슷한 추억이 있다. 친한 친구 한 녀석이 있는데, 전화로 무슨 얘기를 한 끝에 '이따가 내가 전화 할게' 라고 하는 것이었다. 당시는 상위 1% 중에서도 휴대전화를 가진 사람은 극소수였던 때였고, 나는 온 종일 전화기 옆에 앉아 전화를 기다렸던 것 같다. 하지만, 뻔히 예상할 수 있듯이 전화는 오지 않았고, 밤 쯤이 되어서인가, 나 역시 '얘가 잊어버렸나보다' 하면서 포기했던 것 같다.

그 후로 두세 번인가 그런 일이 더 있었다. 딱히 할 이야기가 더 있었던 것은 아니기에, 왜 전화 하지 않았냐고 따져 묻기도 좀 이상한 상황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나는 그런 일들이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고, 어느 날은 드디어 그 친구가 '이따가 내가 전화 할게' 라고 할 때, '언제?' 라고 묻고 말았다. '응?' 수화기 구멍으로 그 친구의 당황이 줄줄 흘러 내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우울하게도 또다시 '유레카' 를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친구에게 있어서 '이따가 전화 할게' 는 그냥 '잘있어' 와 비슷한 인사말이 었던 거다. 전화를 걸 때엔 '안녕하세요' 하지 않고 '여보세요' 하듯이, 전화를 끊을 때에는 '잘있어' 나, '잘가'나, 그런 말 대신 그냥 '이따가 또 전화 할게' 였던 것이었다.

힘든 학습을 한 나는, 그 친구의 '이따가 전화 할게' 에 더이상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내가 확인 해 보고 바로 전화 줄게' 라던지, '7시 경에 일 마치면 전화 할게' 처럼, 확실히 인사말이 아닌 것으로 판단되는 경우가 아니면 그냥 '빠이~' 라고 번역해서 이해하게 된다.


근래엔 이런 일도 있었다. 전 직장에서 반 년 가까이 같이 협업을 한 직원이 있었다. 다른 회사로 파견 나가서, 단 둘이서만 같이 일을 한 셈이고, 협업이 꽤 잘 된 것 같다. 혼자만의 착각이었을지 몰라도, 인간으로서의 관계도 좋은 편이었다고 생각된다.

직장을 옮기고 나서, 그 직원 입장에서도 안좋은 회사에 계속 다니느니, 우리 회사로 옮겨서, 계속 같이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언제 한 번 만나서 저녁 식사라도 같이 하자고 연락을 했었다. '제가 다음 주쯤에 시간 내서 연락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연락은 없었고, 한 달쯤 뒤에 내가 다시 연락을 했던 것 같다. 그때도 비슷한 대답을 들었던 것 같고, 그 이후로는 서로 연락이 없는 상태다.

그러다가 근래에 이런 신문 기사를 봤다. 분명 요 근래 본 것 같은데, 인터넷 검색으로는 2007년 기사밖에 안 나온다.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ctg=12&total_id=2958185

이런...... 내가 한 말은 비록 진심이었어도, '가장 흔한 거짓말 1등!' 이었던 거다. 왠지 서글펐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듣는 사람은 그 뜻을 전혀 다르게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내 '시간 내서 저녁 한 번 같이 먹자' 는 그에게 '안녕히 계세요' 로 번역되었고, 그는 나에게 '다음 주쯤 시간 내서 연락 드리겠습니다' 라는 형식으로 '안녕히 계세요' 라는 이야기를 한 것 같다.

마치 외국인이 된 듯한 느낌이다. 사전에는 이러이러한 뜻인데, 관용적으로는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이는, 타 문화권의 의사 소통 장벽에 걸린 듯한 느낌이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대로 계속 가면 언젠가는 번역기조차 '언제 밥 한 번 먹자'를 'Good-bye'로 번역하게 될까? 현재 구글의 번역기는 이도 저도 아닌 생뚱맞은 답을 내 놓고 있긴 하다.
http://translate.google.com/#ko|en|%EC%96%B8%EC%A0%9C%20%EB%B0%A5%20%ED%95%9C%20%EB%B2%88%20%EB%A8%B9%EC%9E%90.%0A
'You eat rice once.' 라니.

여기에 내가 쓴 글은 다른 사람에게 어떤 뜻으로 읽힐까. 아니, 과연 읽히기나 하는 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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