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November 15, 2005

World Of Warcraft

한동안 삶의 의욕을 잃고 지냈었다.

이상하게도 현실의 삶은 무슨 영화의 한장면처럼 나날이 무채색으로 퇴색되어 갔고, 급기야는 회색빛 세상이 반투명하게 사라져가는 느낌이었다. 내 주변의 어떤 것들도 현실감이 없고, 살아있다는 것이 실감도 안날 뿐더러 그다지 계속 살아가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 무기력한 나날들.....

그럴 때 지인 한 사람이 World Of Warcraft란 게임을 해 보라고 끈질기게 권유했다.

난 예전부터 게임을 무척 좋아하는 편이었고, 그 중에도 특히 환타지풍의 롤플레잉을 좋아한다. 꼭 찝어서 말하자면, Ultima를 너무 너무 좋아했었다. 그래서 나중에 Diablo 같은 게임들이 나왔을 때는 너무 빠져들까봐 두려워서 오히려 해 보지 못하기도 했었다.

내가 Iolo, Shamino를 비롯한 동료들과 Britannia의 여러 dungeon들을 헤매고 다니던 때로부터 무척 많은 시간이 흘렀기에, 지금 사람들은 computer가 만들어 낸 character 들이 아니라 사람들끼리 모여서 새로운 dungeon이나 도시들을 여행한다. 요즘은 하다못해 Tetris 같은 것을 하더라도 on-line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해야만 하는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너무 이런 세상에서 뒤떨어진 것이 아닐까 해서 한 번쯤은 나도 MMORPG라 불리는 게임을 해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속칭 '폐인제조기'라 불리는 리니지는 굳이 아니더라도 마비노기, 샤이아, 프리스트, 뮤 등등 게임들은 숱하게 많으니......

그러던 차에 마침 삶에 의욕도 없고 목표도 없는데 이거라도 해 보라던 지인이, 이 게임의 유료 계정을 만들면 거나한 식사를 한 끼 쏘겠다고 해서, 이참 저참에 큰 맘 먹고 시작했다.

시 작하는 것이 꼭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일단 화려한 3D Graphic을 자랑하는 이 게임을 하려고 video card를 비교적 잘 나가는 놈으로 바꾸었고, 내가 한동안 사랑하던 e-Donkey가 hard disk를 모두 차지해 버린 탓에, 4GB가량 되는 이 게임을 새로 설치하려고 hard disk도 하나 구입했다. 게다가 며칠 전에는 급기야 RAM까지 두 배로 늘렸다. (RAM을 늘린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단지 Griffin을 타고 날아다닐 때, 좀 더 멋있는 영상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혹시 라도 재미가 없을까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적지 않은 금액의 이용료를 지불해야 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그 게임에 매달려 있었을 뿐 아니라, 나는 웬만큼 재미 없는 게임도 무감각하게 몰입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Tetris나 Hexa보다 약간만 더 복잡하면서 재미있다면 아마도 두어 주일은 잘 놀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전에 봤던 NOX 라는 게임. 그건 나름대로 열심히 한글화를 했음에도, 뭔가 싸구려 번역기로 번역했을 지 모른다는 의심이 드는 번역과, 사무직 여직원이 그냥 마이크 붙잡고 녹음했을 걸로 추정되는 우리말 녹음이, 영문판을 구해서 비교해보고 싶은 충동까지 느끼게 했었기에, 이것도 괜히 한글판이 환타지를 망쳐 놓지나 않을지 의심스럽긴 했었다.

첫날, 유료 계정을 시작하기 전에 맛보기 격으로 게임방에서 두어 시간 해 보았다. 처음이라 조작이 좀 서툴긴 했지만, 충분히 따라갈 수 있는 쉬운 조작에, 익히 봐 두었던 수려한 그래픽, 게다가 무엇보다도 환상을 충족시키는 신비로운 각종 마법들......

그러나 뭔가가 부족했다. 내용으로 봐서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내용이고, 미친듯이 빠져 들 준비가 되어 있는 내가 왠지 쉽사리 그 세계에 몰입할 수가 없었다. 왜일까?

유 명 B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라는 유혹에 일단 유료 계정을 끊고 나서 우연한 기회에 내가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첫 날에는 맛보기랍시고 아는 사람 대여섯 명이 모여서 함께 뛰어다녔던 것이 문제였다. 나는 컴퓨터 속에서도 아는 사람들을 만나서 함께 돌아다니는 것이 달갑지 않았나보다. 전혀 다른 인물을 생성해서 아무도 몰래 혼자 그 게임을 했을 때, 나는 홀딱 밤을 새우고 말았다.

내 방에서, 내 컴퓨터에 앉아서, 혼자 조용히 게임을 하면, 게임방에서와는 달리 게임의 효과음도 훨씬 생생하게 들을 수 있고,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으니 정말 깊이 몰입할 수 있지 않은가! 게다가 괜히 아는 척 하는 사람도 없으니 나는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돌아다니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한글화가 제법 잘 되어 있어서 각종 도구들의 이름이나 인물들의 대사가 거의 위화감을 조성하지 않는다.

그 세계는 제법 정교하게 꾸며져 있다. 나는 요리를 할 수도 있고, 낚시를 할 수도 있고, 곰과 싸울 수도 있고, 곰 가죽을 벗길 수도 있고......

오동통한 여자 난장이-드워프- 종족을 선택하고, 사냥꾼이라는 직업을 선택했다. 총과 손도끼를 들고 다니면서 동물들을 때려 잡고, 가죽을 벗겨서는 옷을 만들어 입고, 나중에는 야생 곰을 한마리 길들여서 데리고 다니게 되었다.

무척 재미있는 경험이다. 한동안은 이 게임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 같다. 걱정했던 어설픈 한글화도 없었다. 상당히 매끄러운 번역과, 제대로 된 성우를 써서 제대로 된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듯한 분위기있는 음성들이 오히려 그 세계를 더욱 친숙하게 느끼도록 해 주는 것 같다.

일단 사냥꾼으로서의 경력을 다 쌓고 나면, 처음에 시작했던 흑마법사도 해 보고 싶고, 그렇게 되면 동물 가죽을 벗기는 일 보다는 마법 물약을 만들고, 헝겊 옷감으로 옷과 가방을 만드는 일을 해 보고 싶다. 그 다음엔 전사나 기사 계열로 치열한 전투를 하면서, 광물을 캐고 그걸로 도검류나 갑옷류를 만드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다. 물론 그만큼 할 정도가 되면 게임회사에서는 적절한 확장팩을 만들어서 내가 현실의 세계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미끼로 사용할 것이다.

회색으로 탈색된 세계가 반투명해 진 것으로도 모자라서, 이제는 내 발이 점점 떠오르는 듯하다. 나는 현실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 이제 언제 죽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한 주일에 두어 번은 네 시 넘어서 자고, 나머지도 최소한 두 시는 넘어야 잠자리에 드니......

내 곰에는 '야성에 눈뜬 푸우' 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나는 오늘도 그 곰과 함께 환상의 세계를 거닌다. 점점 더 현실을 잃어버리며...... 이런 것이 폐인이라는 거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