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October 11, 2006

국화옆에서 미를 논하다

패러디와 엽기와 반전을 주 소재로 삼는 와탕카라는 만화가 있다. 거기에서 이런 글이 나온 적이 있다.

"아름다움이란 절대적인 개념보다는 상대적인 개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과거와 현재가, 또 동양과 서양이 서로 다르지요. 그것을 판단하는 미적 기준은 사회와 시대의 요구, 구성원들의 욕구를 반영해 늘 유동적으로 변천해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지당한 말씀이다. 하지만, 그 각양 각색으로 보이는 기준들 안에 흐르는 어떤 원칙 같은 것이 혹시나 있지 않을까? 그런 것이 조금이라도 있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넘어서도 아름다움의 정수라 일컬어지는 소위 [고전] 딱지가 붙는 예술들이 존재하는 것 아닐까?

회사 근처의 길가에서 국화 전시회를 했다. 말 그대로 형형색색의 국화꽃들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그중에 어느 꽃을 촬영했다. 이 꽃은 약간 큰 편이긴 하지만 유난히 큰 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가느다란 대궁에 얹힌, 걸맞지 않게 커다란 꽃을 스스로 지탱하지 못해서 인간이 이렇게 지지대를 세워 줘야만 하지 않는가! 비록 수많은 인간들이, 아니 대부분의 인간들이 이 꽃을 보며 아름답다고 느낄지라도 이 꽃 스스로는 이 부자연스러운 모습에서 결코 아름다움을 느낄 것 같지 않다.

좀 동떨어진 얘기지만, 미운오리새끼를 보자. 덩치만 커다랗고 못생긴 오리새끼가 어찌어찌 살다 보니 어느날 갑자기 스스로 자신이 아름다운 백조임을 깨닫는다는 고전적인, 하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다소 엽기적일 수도 있는 이 이야기 말이다.

분명 처음에는 오리의 관점에서 백조 새끼를 보았다. 따라서 뭔가 사회적(?) 기준에서 상당히 동떨어진 외양을 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주인공은 자신의 주체성 따위는 애시당초 염두에 두지도 않은 채 주위의 시선에 그저 괴로워 할 뿐이다. 그러다가 어느날, 홀연히 자신이 [아름다운] 백조임을 깨닫고는 행복해진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되는 전개가 있을 수 있을까?

먼저, 백조가 오리보다 아름답다는 생각은 백조의 생각도 아니고, 오리의 생각도 아니고, 인간, 그중에서도 일부 인간의 생각일 뿐이다. (다시 생각해 보니, 백조는 당연히 오리보다 백조가 아름답다고 느낄 지도 모르겠다.) 만일 이때도 처음 오리의 관점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백조는 지나치게 덩치가 크고, 쓸 데 없이 모가지만 긴 데다가 불편하게 창백한 색깔을 가진, 여전히 못 봐줄 정도로 미운 오리일 뿐이지 않을까?

이 불쌍하고 비참한 주인공은 자신의 시선도 아니고, 지금까지 자신이 가졌던 오리의 시선도 아닌 인간의 시선에 의해 약간 더 아름다운 것 같기도 하다는 것만으로 자신이 그때까지 미운 오리새끼였다는 사실을 벗어버리고 행복한 백조로 거듭나는 데다가 오리들에 대한 우월감마저 보여주는 역시 새대가리 다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런 책들을 너무 많이 읽어서인지, 며칠 전의 신문 기사에는 우리나라 여자 초등학생의 60% 가량이 성형수술을 원한다는 사실을 보도했었다. 내가 과연 무엇인지, 얼만큼이나 가치가 있는지는, 무엇보다도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얼만큼 아름답게 생각하는지에 달려 있다는 새대가리적 가치관을 충분히 성공적으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식물에게 있어서 꽃이란 생식기관이다. 자신의 몸이 지탱하기에 비정상적으로 커져버린 생식기관을 매달고 힘들어하는 국화의 모습은, 어떤 점에선 척추에 부담을 주면서까지 보기에도 부담스러운 실리콘 덩어리를 가슴에 매단 현대 인간의 여자들과 닮은 것도 같다.

왠지 요즘 시대가 추구하는 미의 기준이 시간과 공간을 건너서까지 공감대를 형성할 것 같지는 않다. 당장 나조차도 별로 공감하고 싶지 않고......

참, 위에 언급한 와탕카는 위의 멋진 대사 바로 다음에 그 만화의 애독자층을 실망시키지 않을 만큼 충분히 엽기적인 반전을 마련해 두고 있다. 궁금하면 찾아보시라. 와탕카 629회. [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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