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April 19, 2006

11층의 천민들

꽤 오랬동안 고통에 빠져 있었다. 물론 지금도 고통스럽다.
고통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지만, 계속 겪으면서 익숙해
진 건지, 약간은 견딜 만도 하다.

고통에 의한 우울함 때문인지 세상 모든 것이 불만스럽다.
그중에도 특히나 회사가 불만스럽다. 얼마 전에 올해 말까지
존재할 확률이 50%도 안된다고 예언(?) 했더니 그런 대로
기정사실이 되어 버리기도 했고......

우리 회사는 지금 건물의 5층, 9층, 10층, 11층, 12층을 쓴다.
지난번에 썼던 그 무서운 엘리베이터가 있는 그 건물. (요즘도
그 아가씨는 가끔 날카로운 비명소리로 사람들의 애간장을
후벼 파곤 한다. -_-;)

엘리베이터 얘기가 나온 김에 그 얘기부터 해야 겠다.
엘리베이터가 세 대가 있다. 그중 한 대는 지하 주차장부터
전층을 운행하지만, 나머지는 1층부터 운행하고, 하나는
홀수층만, 다른 하나는 짝수층만 운행한다. 나름대로
합리적인 운행 방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우리 회사가 첨 이사오면서 12층에 사장실을 정했단
사실이다. 사장님이 식사하러 가시기에 무척 불편했는지
건물측과 협의를 해서 홀수층 운행 엘리베이터도 12층에
서도록 조치를 취했다. 에휴~~~

이정도까지는 복지부동과 체제순응을 미덕으로 삼는 한국
사회에서 별로 문제 삼을 일이 아닐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언제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홀수층 엘리베이터를 10층도
사용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도대체 뭐지? 원칙 같은 것은 어디 있는 거지? 그렇게 할 거면
11층도 당연히 짝수층 전용 엘리베이터를 사용할 수 있어야
공평하지 않을까? 그것보다 외부 손님들을 맞이하는 9층에
가장 먼저 조치를 취했어야 하는 것 아닐까? (하긴.... 별로 도움
되는 손님이 오진 않는 듯하다. -_-;)

그 다음으로 화장실.

언제인가 회사에서 전체 화장실에 비데를 설치했다. (여자
화장실은 확인 안 해 봤다.) 잘 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문제는 이걸 11층 것만 꺼 둔다는 것이다. 도대체 왜?

처음에 꺼져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는 이거 고장났나보다
했었다. 그런데 며칠 동안 보니 11층에 있는 것이 전부 다
꺼져 있는 것이었다. 반면에 다른 층에 있는 것은 다 켜져
있는 듯했다.

안그래도 11층은 다른 층에 비해 인구 밀도도 높은 편이라
화장실도 모자라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비데까지 꺼 놓는
다면 섭섭하지.

인사팀에 얘기했다. 켜 줬다. 하루이틀 지나서 또 꺼졌다.
역시 11층만. 짜증나서 더 얘기 안 한다. 대신 11층 화장실
잘 안쓴다. 꼭 비데 때문만은 아니다.

언젠가 갑자기 엉덩이가 마구 가려웠다. 보니까 뭐 뻘건 것이
났다. 이상한 병 옮을 만한 재미있는(?) 뭔가를 한 것도
아닌데 도대체 웬일이지? 근데 그 증상이 희안하게도 화장실만
갔다 오면 더 심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화장실 변기에 닿는
부위만 집중적으로 발그레 하다.

언제부턴가 화장실에서 이상한 화학약품 냄새가 났다.
세제인 것도 같다. 변기 시트에 도대체 뭔 짓을 한 건지
미끈미끈하고 자극적인 냄새를 풍기는 세제 내지는 약품이
코팅되어 있다.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부주의한 건지 아니면
어떤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건지...... 당연히 이것도 11층만의
현상이다.

마지막으로 인구밀도. 정확히 수를 헤아려 본 것은 아니지만
11층은 타 층에 비해서 인구밀도가 꽤 높은 듯하다. 그래서
여름엔 같이 냉방을 해도 엄청나게 덥다. 물론 이건 인구만의
효과는 아니다. 대부분이 소프트웨어를 만지는 인원인지라
다들 컴을 껴안고 있고, 업무시간 내내 거의 쉬지 않고 컴을
돌릴 수 밖에 없다. 당연히 컴퓨터에서는 따끈따끈한 공기가
계속 뿜어져 나온다.

이런 저런 효과들의 종합으로 11층은 항상 후덥지근한 공기에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난다. 이런 곳에서 하루 12시간씩 일하는
직원들은 나날이 쇠약해져 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여기까지의 불평불만이 차곡 차곡 쌓인 결과, 11층은 천민
수용소라는 좀 황당한 결론이 되어 버렸다.

내가 혹시라도 교수대를 디자인하게 된다면 전통적인 13계단이
아닌 11계단의 파격적인 디자인을 하고 말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