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December 23, 2006

악쓰지좀 마!

악을 쓴다.

이 말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사전적 정의나 사회적 함의와는 무관하게, 여기서는 잠깐동안 이렇게 정의하기로 하자: 상대방의 수용이나 반응 여부와는 무관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을 계속 반복하는 일방적인 형태의 의사표현.

세상에는 참 많은 종류의 존재들이 악을 써 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TV 이다. 내 소유 하에 있고, 내가 리모콘을 쥐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TV는 내 의사와는 전혀 관계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끊임없이 늘어놓는다. 정 할 얘기가 없어지면 의식을 흐릿하게 만드는 어지러운 반점들과 무의미한 소음 내지는 단조로운 기계음이라도 계속 늘어 놓는다.

물론 TV의 주 목적이 지지지직~~ 내지는 뚜~~~ 를 들려주는 것이 아닌 만큼, 보통은 이런 저런 인간들이 나와서 울고 웃고 떠들고 하는데, 기본적으로 악을 쓴다는 점은 전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언젠가 무슨 코메디를 봤는데, 업무보고서 형식으로 요약한다면 1분 30초로 끝낼 수 있을 것 같은 내용인데, 유치한 농담을 곁들이고, 여러 장면을 중복하고, 효과음을 넣는 등의 갖가지 발악으로 30분 가까이 분량으로 늘였다는 사실이 확연했다. 보는 중간에 화가 나서 꺼버리고 싶었지만, 당시 내게 그 권한이 있지 않아서 더욱 화가 났다.

사실 난 언제부터인지 TV를 거의 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항상 악을 써 대는 TV 또는 길가의 광고판을 볼 때면 늘상 짜증이 나거나 화가 난다. 앞으로도 도무지 TV와는 친해질 것 같지 않다.

또 한 가지 흔히 볼 수 있는 악쓰는 존재는 인터넷 웹상에 흔히 보이는 플래시이다.

사용자에게 갖가지 컨트롤을 제공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ESC를 눌러 주면 조용히 닥쳐 주는 예의를 아는 기존의 미디어들과는 달리 플래시는 사용자에게 단 한 순간의 선택권을 제공할 뿐이다. 최초에 단 한 번, 플래시 플레이어를 설치할 지 말 지 묻는 순간, 일단 설치하고 나면 선택은 없다. 웹사이트에 따라서는 내가 보고 싶은 내용물에 접근하기 전에 일단 전체 화면 플래시를 감상해 줘야 하기도 하고, 어느 페이지에 가도 화면 한 구석에는 악을 써 대는 플래시가 있으며, 그것을 멈출 방법은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지금 내 컴퓨터는 2.4GHz 의 클럭 스피드로 동작한다. 인텔 계열의 CPU이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이 CPU에서 INC operation 을 수행하려면 2 clock이 필요하다. 따라서 2초면 2.4G 번의 INC 연산을 수행할 수 있다. 2.4G. 24억이다. 내가 지금까지 평생 벌어 모은 돈을 전부 1원짜리로 바꿔도 그걸 다 세는 데 2초가 안 걸릴 만큼 빠른 속도로 동작하는, 믿기 힘들 만큼 훌륭한 기계이다. (왠지.... 나한테 과분하단 생각이 들 정도다. 사실 더 빠른 기계로 바꿀까 생각 중이었는데...... -_-;) 그런데, 이렇게 빠른 기계조차도 한구석에서 플래시가 악을 써 대기 시작하면 CPU의 70% 가량을 점유한다. 너무 하는 것 아닌가?

얘를 닥치게 하기 위해서 수많은 플래시 틈을 뚫고 인터넷을 검색해야 했다. 예상 외로 이건 멀지 않은 곳에 답이 있었다.
http://flashblock.mozdev.org/installation1.html
Mozilla Firefox에서 flash를 원천봉쇄해 주는 혁신적인 도구였다. 이제 모든 플래시는 내 허가를 받기 전에는 닥치고 가만히 있게 되었다. 플래시를 만든 개발자들에게는 영원히 불타는 유황지옥을, flashblock을 만든 분들께는 신의 축복을......

또하나 빼놓을 수 없는 악쓰는 존재가 있다. 차떼기 장사치들.

점포 한 칸 마련하지 못해서 차에 물건을 싣고 다니면서 장사를 하는, 어찌 보면 영세하고 가련한 분들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내 창 밖에서 내게 쏟아 붓는 소음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였다. 그당시 나는 한동안 밤에 활동하고 낮에 자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항상 똑같은 장사치가 내 방 창 밑에서 계속 악을 써서 내 단잠을 방해하곤 했었다. 하루는 참다 못해 나가서 항의를 했다. 너무 시끄럽다고. 그러나, 내가 체구도 작고 어려서 무시해도 되겠다 싶었던지 오히려 내게 마구 화를 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왜 이해를 못하냐는 식이었다. 당시는 그냥 참고 말았지만, 지금의 나였다면 바로 경찰을 불렀을 거다.

요즘도 내 방 창가에는 가끔씩 악쓰는 장사치가 지나간다. "염전에서 직접 가져와 소금 무지무지 싸게 팔아요" 라는 단조로운 톤의 악다구니를 다른 장사치의 몇 배나 큰 소리로 내뱉는 악당이다. 여름엔 내가 평일에 기상하기 전부터 와서 악을 써 대기도 한다. 몇 년째 시달리고 있는 솔직한 심정으론 붙잡아 묶어 놓고 송곳으로 난자해 살해하고 싶을 지경이다. 특히나 모처럼 달콤하게 늦잠을 자는 주말 아침이면 더욱 그렇다.

여기까지 본 악다구니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광고였다. 광고 자체가 악다구니의 속성을 갖고 있기도 한 것 같고...... 어떻게든 돈 좀 벌고 싶다는 천박한 욕망을 용납하고 싶진 않지만, 이해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악다구니도 있게 마련이다. 바로 "예수천국 불신지옥".

지하철을 타고 다니다 보면 가끔씩 말쑥한 양복을 입은 아저씨가 시꺼먼 책을 손에 들고 마구 악을 써 대는 것을 볼 수 있다. 내용인즉슨 요약하면 "예수천국 불신지옥" 인데, 난 그 모습을 보면 섬찟하다.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도대체 뭔 짓을 당했길래 저모양이 됐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가장 강렬한 감정은, 그 사람이 즉시 그의 천국으로 가 버려서 다시는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는 감정이다. 그런 사람들이 아무리 외쳐 봐야, 결국은 악다구니 써 대는 인간들만 득실거릴 것 같은 그들의 천국에 나는 절대로 가고 싶지 않다.

멀쩡해 보이는 그 아저씨와는 달리 완전히 풀린 눈동자로 힘없이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중얼대는 아주머니도 있다. 불쌍하다. 뭔가 신앙심 같은 것이 있다기 보다는 안하면 누군가에게 얻어맞을까봐 마지 못해 하는 것도 같다. 그래도 악다구니가 듣기 싫긴 마찬가지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악을 쓰는 존재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자살만이 대안일까?

누군가 멋진 슈퍼 히어로가 등장해서 악쓰는 존재들을 하나 하나 소거해 줬으면 좋겠다. 가장 먼저 소금장수부터.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