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July 22, 2009

은퇴

일년 반 여 만에 쓰는 글이 이런 내용이 되고 말았다.
조금 유감스럽지만, 7월 21일부로 직장을 그만두었다.
딱히 다른 직장을 구하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사실상의 은퇴가 되지 않을까 싶다.

지난 한해 동안 많이 힘들었다. 꼭 찝어서 나만 힘들었던 건 아닌데, 재수없게도 꼭 찝어서 나만 병이 나 버렸고, 좀처럼 체력이 회복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단순히 그저 일하기 싫은 꾀병이었는지, 정말 몸이 개운찮은 것인지 나 스스로도 궁금했는데, 회사에서 간 산행길에 확인할 수 있었다. 작년에는 하나도 힘든 줄 모르고 올랐던 산길이 헐떡대며 따라가는 것 만으로도 너무 벅찼다. 아, 정말 내가 많이 망가졌구나......

지금으로부터 거의 30년쯤 전... '국민학교' 라는 학교를 다니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아침이면 마지못해 등교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걸까. 그래서 막연히 학교 가기 싫다고 떼를 쓰기도 했던 것 같다. 정확히 몇 시쯤 등교했는 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히 점심 시간 전에 하교 했던 것 같다. 그런데도 왠지 스스로 갑갑하고 한심하고 싫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의 그 감정은 그 이후 별 이유 없이 사그러들었고, 줄곧 나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비교적 정확한 시간에 등교하는 비교적 모범적인 학생이 되었다. 이후 등교가 출근이 되었을 뿐, 아침에 일어나서 마지못해 자리를 박차고 나서는 일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고, 지난해 말에서 올해 초쯤은 '지옥같다'는 표현을 쓸 만큼 힘들어 진 적도 있었다. 아침 9시쯤 출근하지만, 점심때는 커녕 거기서 시계바늘이 한 바퀴를 더 돌아, 밤 열두 시가 되어서야 가까스로 퇴근하곤 했으니까.

그러다가 덜컥 병이 나 버렸고, 그 덕분인지 이렇게 퇴직을 결심하게 되고 말았다. 인터넷을 아무리 뒤적거려 봐도, 그 병은 과로나 스트레스 와는 별 연관이 없이 '재수없어서' 걸린 병일 확률이 무척 높아 보였다. 그래 봐야 떨어진 체력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업무 환경이 나아 지는 것도 아니고......

1996년 2월에 시작한 직장생활이니 13년 반쯤. 드디어 마지 못해 출근하는 일을 손에서 놓아 버렸다. '생활비는 어디서 구하지?' 라는 간결하지만 원초적인 질문 한 가지만 살짝 마음 한켠에서 감추어 버리면 대체적으로 행복하다.

일단 이번 달엔 그저 뒹굴 뒹굴 쉬다가 다음달 부터는 학원 정도 나가 볼 생각이다. 돈 떨어질 때까지 아무 돈벌이를 찾지 못한다면 서울역 앞에 신문지를 펴고 누워야 할 지 모르지만, 일단은 당장의 행복을 위해서 앞서 말한 것처럼 살짝 마음 한켠에서 감추어 버리고 지내기로 했다.

퇴직 기념 선물을 받았다. 바로 이거!

처음 포장을 열고는 흠칫 놀랐다. 필시 Admin 하시는 여직원이 골랐을 텐데, 남자가 면도기를 바꾸는 일은 여자가 기초화장품을 바꾸는 일에 비견될 만큼 피곤하고 까다로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을까, 아니면 나는 당연히 까탈스럽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을까, (왠지 나는 이런 데 둔감하긴 하다.) 아니면 마침 내가 같은 회사 제품의 면도기를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골랐을까. (이 경우는 흠좀무...)

도저히 내 배포로는 선뜻 집어 들지 못할 이런 고급품 면도기를 선물받은 것은 감사하고 기쁜 일이지만, 정작 어디 나갈 일도 없는 백수가 감히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될 지 황송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지금 쓰고 있는 면도기도 아무 문제 없이 잘 쓰고 있는데...... (5년 정도 되긴 했다. ^^;)

일단은 잘 먹고, 잘 자고, 운동도 하고, 짬짬이(?) WOW나 열심히 해야 겠다.

=^.^=